

“덥지 않아요, 쟈밀 선배?”
“…열사의 나라 출신에게 이 정도의 더위는 별 거 아냐.”
“그래요? 저는 더위에 약해서, 역시 힘들어요~”
“그런 말은…”
쟈밀은 그를 보며 한숨 쉬었다. 그런 말은 내게서 떨어진 다음에 하도록 해, 감독생. 평소 유카라고 부르던 쟈밀의 입에서 감독생이라는 딱딱한 호칭이 툭 튀어나왔다. 쟈밀이 생각하기에 공석적인 자리라고 느껴지거나 주변에 사람이 많을 때 나오는 호칭이었다. 이 말은 달리 말하자면 카림을 포함해 셋이 있거나 -쟈밀이 없다면 유카는 굳이 카림을 찾지 않은 탓에 그들은 주로 셋이 있었다.- 학교에 있었을 때는 그의 이름인 유카, 라고 부르는 일이 많은 쪽이었다. 그런 그가 일부러, 티가 나도록 감독생이라 부른 건 유카에게 주의를 주는 이유였다. 더운 날씨인 건 분명하고, 그가 더위에 약하다는 사실은 이제 카림도 알게 되었는데, 왜 굳이 제 팔에 매달리며 덥다고 불만을 표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떨어지면 그만이잖아. 그렇다고 쟈밀이 직접 그를 밀어낸 건 아니었다. 어차피 더운 건 제 쪽이 아니라 상대방이었다. 멋대로 붙어있는 쪽도 상대방이었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괜한 힘을 쓰고 싶지 않기도 하였다. …라고 말하다면 분명 핑계가 될 뿐이겠지. 쟈밀은 굳이 유카를 제게서 떨어트리지 않았다.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평생 제 입에서 내뱉지 못할 이유로, 쟈밀은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제게 붙어있는 상황을 만족하고 있었다.
*
“여름을 느끼고 싶어요!”
유카는 고개를 꼿꼿하게 세워 쟈밀에게 내밀었다. 두 사람의 키차이를 생각하자면 유카 쪽에서 뒷꿈치를 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쟈밀은 제 코앞에 있는 모습에 숨을 삼켰지만 고개를 피하지는 않았다. 한참 상대의 얼굴을 살피고 나서야 한 발자국 물러나 입을 열었다.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거지?”
“그야, 여름이라고 생각하면 스카라비아 밖에 없잖아요. 학교 안은 너무 쾌적하다구요. 제 기숙사는 너무 우중충하고.”
“…학교가 쾌적한 게 불만인 거야?”
“낭만이 없는 게 불만이죠.”
“애초에 말야, 너. 분명 더위에 약했을 텐데?”
쟈밀은 제 팔짱을 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가 더위에 약한 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얘기하자면… 쟈밀에게 있어 덮어두고 싶은 기억 중 하나를 꺼내게 되겠지만, 어쨌든, 쟈밀은 성적 증진을 위한 훈련이란 핑계로, 스카라비아 기숙사생과 낡은 기숙사의 유카와 그림까지 포함해 혹독한 원정을 시켰을 때, 사막의 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졌던 유카를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이 그리 쉽게 쓰러질 수 있던가. 독을 먹은 것도 아니다. 습격을 당한 것도 아니고. 뜨거운 태양 아래 걸음을 멈추지 않은 걸로 툭, 하고 쓰러진 모습은 솔직히 말해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스카라비아 학생들은 원정을 가는 일로 쓰러지지 않을 체력이었고, 카림과 쟈밀도 마찬가지였다. 하다못해 다른 기숙사생들을 데려와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체력이 약한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유카는 걸음을 오래 걷지 못한 채 쓰러졌고, 때문에 카림을 향한 원성도 커졌지만, 정작 죄책감을 가진 건 쟈밀이었다. 쟈밀은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후에 한 말을 잊을 수 없었다.
‘저, 더위에는 꽤 약해서요. 아하하, 그래도 쓰러진 건 처음이네요.’
웃으면서 할 말이 아니잖아. 오래 가지 않은 더위에 유카는 금방 정신 차렸고, 쟈밀은 차마 그를 원정에서 제외시키자고 말할 수 없었다. 단지 원정을 나가는 날, 물 하나 더 쥐어준 게 전부였다. 모든 일이 정리된 후에도, 쟈밀은 그가 더위에 약하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도 잘 알면서, 무슨 바람이 불어 지금 제 앞에 더위를 즐기겠다고 말하는 건지. 쟈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뜬금없는 말을 하거나 갑자기 일을 진행시키는 건 카림과 다를 바 없을 지경이었다. 제일 똑같은 건… 두 사람 다 쟈밀이 어떤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쟈밀은 제게 놓인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적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건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일인데. 제 말에 고민하는 유카를 바라보았다. 잔치를 열자, 하고 말하는 카림을 말리는 일보다 유카가 하고픈 걸 막게 하는 일이 더 어려운 건 어찌 할 수 없었다.
“…밖에 오래 있지 않을 거라면 고려해보도록 하지.”
“정말요? 정말, 스카라비아에 가서 소풍하게 해주는 건가요? 맛있는 것도 먹고, 오아시스에서 다시 또 수영하게 해주는 거죠?”
“대체 어디까지 계획을 세우고 온 거야…?”
유카는 고개를 내젓는 쟈밀에게서 등 돌린 채 그림과 손뼉을 맞추었다. 바캉스다~! 하고.
*
그리고 지금으로 돌아와 유카가 쟈밀 옆에 딱 붙어있는 상황은 복잡한 일이 엮어 발생한 결과는 아니었다. 오아시스까지 카림과 사이좋게 앉아 가도 된다는 쟈밀의 의견을 무시하고, 유카는 쟈밀 곁에 있는 걸 선택했다. 그걸 선택이라 부르기에는 어색하겠지만. 유카는 언제나 카림보다 자신을 찾았다. 처음에는 종자처럼 일을 시킬 마음에 부르는 줄 알았고, 부름에 제 때 답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에게서 직접 카림 선배보다는 쟈밀 선배가 더 좋아서요, 라는 말을 듣고 평소보다 빨리 뛰는 두근거림을 알 수 있었다. 카림보다는 내가 더. 그 말만큼 저를 기쁘게 하는 말은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저는 이미 전부터 유카를 눈독 들이고 있었던 것 같으나, 가장 큰 계기는 결국 그 말이었다. 카림보다는 내가 더. 유카가 타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 건 이후로 며칠이 더 지난 다음이었다.
그렇다고 쟈밀이 유카가 다시 힘든 길을 걷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전처럼 많은 인원이 동원된 상황도 아닌지라 쟈밀은 셋이 사이좋게 양탄자를 타고 가자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유카에게 양산과 물을 쥐어주는 일도 잊지 않은 채였다. 유카는 한 손으로 양산을 돌리면서 다른 팔은 쟈밀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를 보고 카림은 사이좋구나!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쟈밀은 부정하지 않았다. 유카가 저를 선택하는 이상, 카림의 말대로 유카와 사이가 좋은 건 제 쪽이란 확신이 있었다. 지금 눈치로 봐서 카림은 유카를 친구 이상으로 보지 않는 듯하고. 그러니 유카가 제 손에 들어오는 건…
“아, 맞다. 저 이번에 수영복 챙겼어요.”
“수영복? 상점에서 팔았던가.”
“으음, 수영복이라고 할까. 레오 선배한테 또 옷을 받았을 뿐이지만요.”
“…네가 레오나 선배와 친한 줄은 몰랐는데.”
“그거야~ 위기를 같이 이겨낸 사이라서?”
그게 무슨 사이인데? 위기를 같이 이겨낸 쪽이라면 그건 당연히 나도 포함이잖아. 쟈밀은 목 끝에 걸린 말을 내뱉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유카가 라기 선배랑 수영복처럼 만들었는데요~ 하고 이어가는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지 못한 채 속으로 불만을 내보이고 있었다. 정말이지, 남에게 관심 없는 레오나 선배가 왜 하필 유카의 사정에는 끼어드는지. 분명 이번에도 수영복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수영할 만한 옷도 없이 놀자고 했을리가 없잖아요.”
“아하하~ 그렇지만 쟈밀, 분명 유카는 수영복이 없을 거라고 대신 할 옷을 준비해왔던걸.”
“어라, 그치만 내 옷 사이즈 모르잖아요.”
“…저번에 옷을 빌려준 적이 있으니 가늠했을 뿐이야.”
“어떤 수영복인데요? 응? 어떻게 생겼어요?”
“네 몫은 이미 챙겨왔다고 했잖아. 꺼낼 일 없어.”
“나를 위해 준비한 옷인데도…?!”
냉정해, 쟈밀 선배. 유카는 일부러 입을 비죽 내밀며, 그를 바라보았다. 쟈밀은 그 모습을 보고도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이미 준비해왔다는 걸 알았는데, 아무런 핑계 없이 제 욕망이 담긴 옷을 보여줄 리가 없잖아.
*
그들이 양탄자에서 내려 도착한 곳은, 유카가 연휴동안 스카라비아에서 머물며 본 오아시스였다. 이곳이라면 익숙하지. 유카는 등에 맨 가방을 들고 하늘과 사막을 올려다보았다. 여름이라고 하기에 너무 강렬한 햇빛에 삭막한 풍경이지만, 그래도 더위 덕분에 오아시스에서 더 재밌게 놀 수 있다고 재잘거렸다. 그러고보니 옷은?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사막 한 가운데였고, 있는 건 커다란 오아시스와 야자수 나무 몇 개, 양탄자와 그들 성격에 맞게 챙겨온 짐이었다. 물론, 쟈밀이 챙겨온 짐에 유카가 입을만한 수영복에 탈의실은 아니더라도 몸을 가릴 수 있는 천 따위도 있었고, 애초에 두 사람은 마법을 쓸 수도 있었지만… 유카는 당당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있게 교복 셔츠를 벗어 던졌다. 안에는 낡은 티가 나는 사바나클로의 기숙사복이었다. 리폼이 되어있는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아무리 안에 입었다고 해도 옷을 막 벗지 마…!!”
“아하하~ 미안해요!”
쟈밀의 큰 목소리에도 유카는 웃음으로 대응했다. 그치만, 물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하는 말도 덧붙이며 그림과 함께 오아시스를 향해 달려갔고, 옆에 있던 카림도 역시 그렇지? 하며 유카를 뒤따라 갔기 때문에 쟈밀은 그들을 향해 짐덩이를 맡은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라고…! 쟈밀은 챙겨온 짐을 하나씩 풀어놓고 매지컬 펜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파라솔 밑에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작은 휴식공간이 만들어졌다. 오아시스에는 여전히 두 사람이 물장구치며 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쟈밀은 야자수 나무에 앉아 여전히 물장구를 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물총까지 꺼내 서로를 저격하며 놀고 있었다. 쟈밀도 지지 않는 체력이고, 물 속에 뛰어들어 노는 일도 싫지 않았지만, 그보다 어떻게 쉴 틈 없이 놀 수 있는 건지 의문이 잠시 들기도 하였다. 물 속이라 더위도 괜찮은 건가? 쟈밀은 저도 모르게 드는 의문에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이곳에서 카림을 위협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곳에 온 뒤로 쟈밀은 카림보다 유카를 더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향한 의문이 끊이지 않은 후에야 이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걱정하는 이의 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을. 쟈밀은 제 눈가를 손으로 눌렀다. 좋아하는 이가 생겼다고 해서 지켜야 하는 순위가 바뀔 수 있는 건 아니다.
“쟈밀 선배~?”
스스로를 타이를 때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들면 유카는 쟈밀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아파요? 하고 묻는 말에 쟈밀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쨍한 햇빛을 등 뒤에 두고 내려다보는 얼굴은, 그늘이 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쟈밀은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선배, 제 말 안 듣고 있죠?”
“아니…, 듣고 있어.”
듣고 있었어, 제대로. 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듯이, 카림의 목소리가 얹어져도 오로지 네 목소리만 들리니까. 모두가 카림을 보았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저 태양빛이 나를 비춘다는 느낌. 쟈밀은 유카에게 손을 뻗었다. 그래, 내게 태양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밖에. 이렇게 손을 뻗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제 손을 잡아주는 너밖에. 쟈밀은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노는 게 지겹지도 않냐고 가벼운 말투로 물으면, 해맑게 전혀요! 하는 답이 들려온다. 따사로운 여름, 태양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