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쳤지. 아주 단단히 미쳤어. 가능만 하다면 삼십 분 전의 자신을 한 대만 때리고 싶은 마음이 기어 올라왔다. 그때라도 공포영화는 못 본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야 한다. 고어영화를 잘 보는 거지, 공포를 잘 보는 게 아닌데…, 대체 뭔 배짱이었던 거지. 그러나 이미 늦었다. 여기는 이미 시버의 집이고, 옆에도 그녀가 있고, 티비에서는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영화가 재생되고 있다. 블레어는 애써 긴장하지 않은 척 노력했다. 괜한 자존심이다. 이래서 형이 성격 고치라고 그렇게 잔소리했구나. 괜히 뻗대다가 이런 상황에 그만 좀 처하라고 그랬던 거구나. 그렇지만 누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겠는가. 이미 밑바닥까지 다 알고 있는 사이라고 해도 이런 거까지 공유한 적은 없으니까, 아직은 티 내기 싫은 거다.
하지만 블레어의 노력이 쓸모없게, 살짝 눈만 굴려 블레어를 본 시버는 곧바로 겁먹은 걸 알 수 있었다. 바짝 긴장한 게 눈에 들어왔다. 아이스크림 컵을 들고 있는 손은 굳었고, 시선은 화면보다 조금 더 아래를 향해 있었다. 미세하게 떨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아직까진 영화 속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을 뿐인데도 보이는 반응에 걱정된 시버가 괜찮은지 물어보려던 차, 갑자기 영화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며 튀어나왔고,
“…으윽.”
정말 참으려고 노력한 티가 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보람 정도는 있었다. 이제 블레어의 시선은 완전히 아래를 향해 있었다. 언제 떨어진 건지 바닥을 구르는 쿠션에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무서워요?”
“네? 네… 아뇨, 괜찮아요. 그냥 잠깐 놀라서 그래요….”
시버의 물음에 흠칫 크게 놀라며 블레어가 답했다. 괜찮다고 하기엔 목소리가 많이 흔들린다. 잠깐 시버를 봤다가 다시 티비를 향하는 눈에 초점이 안 보인다. 오늘 블레어와 볼 영화의 제목을 로시에게 말했을 때, 로시가 재밌겠단 눈으로 잘해보라고 말했던 이유를 시버는 이제 알았다. 정말 겁 많네…. 자신도 엄청나게 잘 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정도로 심하진 않다. 옆 사람이 이렇게 겁먹어있으니 역으로 시버는 겁이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블레어가 아예 즐기지를 못하는 모습이라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리모컨으로 잠깐 영화를 멈추며 시버가 물었다.
“…아니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블레어가 겨우 대답했다. 쪽팔리고 뭐고 이제 안 중요하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순순히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공포영화가 싫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요. 그러면 다른 걸로 골랐을 텐데.”
“이게 싫은 것보단… 조금 다른 문제거든요.”
블레어가 진정하려는 듯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고 말했다.
“제가 그래도 사람 나오는 공포영화는 잘 보는데, 이게 사람만 아니면….”
애써 변명하던 것의 뒷말이 잠시 흐려졌다.
“…하여간 정말 그…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피 튀기고,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이 죽는, 그건 정말로 익숙한데… 그 유령은 아니잖아요. 유령, 외계인 이런 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현실에 없잖아요. 우리가 정말로 유령이나 외계인을 만날 일은 없으니, 오히려 덜 무섭지 않아요?”
“정말 없다는 확신을 못 하잖아요. 그리고 사람은 만나면 우리가 잡을 수 있어요.”
제법 진지해보였다. FBI 그것도 BAU팀에서 일하는 사람이 진지하게 유령을 무서워한다는 게 조금 이상한 거 같긴 했지만, 에반 블레어란 사람만 두고 보면 그것대로 또 어울리긴 했다. 유령은 경멸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이해했다는 듯 시버가 끄덕였다.
“혹시 누가 말해줬어요?”
이미 다른 팀원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블레어가 조심스레 물었다. 누가 알려준 거라면 추정되는 사람이… 전부다. 안 그랬을 거라 짐작 가는 사람이 없다. 특히나 모건과 로시. 시버가 일부러 복수하려고 골랐어도 블레어가 할 말은 없다. 지금 관계가 어떻든 간에 쌓인 건 분명 있으니까.
“글쎄, 누굴까요.”
일부러 놀리는 듯 시버가 말을 끌었다. 블레어는 분명 로시일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로시다.
“로시가 말해줬죠?”
“아니요, 사실 아무도 안 말해줬어요. 그냥 여름이라 공포영화가 보고 싶어져 골랐을 뿐인데…”
“인데?”
“생각해보니 당신이 겁먹는 걸 더 보고 싶었던 거 같기도 해요.”
일부러 그리 말하며 시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과 별개로 괜히 블레어의 입이 삐죽 나왔다. 장난인거 알죠? 당연히 알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