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사람과 한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같은 꿈을 꾸는 일은 언제나 기쁨으로 다가왔다. 작년에 부부의 연을 맺은 허묵과 엄채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둘의 새로운 시작과 더욱 찬란한 사랑은 포근한 겨울을 지나, 파릇한 봄을 건너 어느덧 뜨거운 여름으로 옮겨왔다. 서로를 향한 온도도 그만큼 뜨거워졌으리라. 채은은 두 눈을 말똥말똥 깜빡이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건 좀… 별로인데. 정자세로 누운 채은이 허묵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처음부터 저를 바라보며 누워 있던 허묵이 작게 웃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마주치자 놀라움이 평소보다 더했다.
“교수님, 안 자고 있었어요?”
“네, 어떤 작은 바보가 잠 못 자고 뒤척이는 게 느껴져서요.”
“치…….”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요? 요즘 잠을 제때 못 자는 것 같은데.”
고민이랄 건 없었다. 아니,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수면에 방해가 될 정도의 심각한 고민은 아니었다. 개강이니 학점이니 하는 건 개강 시즌이 다가올 때마다 하던 생각들이었으니까. 여름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말. 하루가 다르게 허묵 덕분에 행복을 느끼고 있는 그녀였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가 밤잠을 못 이루는 이유는 더없이 간단하고 또 누군가 들으면 허무하다고 놀릴 만큼 실없는 것이었다.
“…더워서 잠이 안 와요.”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전부터 열대야였죠.”
방 밖의 온도가 섭씨 25도를 넘어가는 무더운 밤을 일컫는 기상 현상이었다. 허묵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는 침실이었지만, 그걸로는 이 방의 온도를, 이 밤의 온도를 식힐 수 없었다. 채은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교수님은 잠 안 와요? 제가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 허묵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게는 이 작은 바보를 재우는 일이 더 중요한걸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렇지만 그 다정함이 채은은 언제나처럼, 소중하고 좋았다. 꼼지락거리던 작은 두 손이 허묵의 손을 수줍게 그러쥐었다. 전해지는 온기가는 여름날의 공기를 실은 탓인지 덥게 느껴졌다.
“잠이 안 온다면 우리, 다른 일을 하도록 할까요?”
“네? 예를 들면요?”
허묵의 나긋한 목소리가 방 안에 별자리를 새기듯 반짝였다. 적어도 채은에게는 그랬다. 허묵은 으음, 하고 짐짓 고민하는 목소리를 내더니 이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다.
“거실에 가서 영화를 봐도 좋고, 당신 좋아하는 야식을 먹어도 좋겠죠. 집 안이 심심하다면 밖에 나가서 잠시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오는 것도 좋을 테고요.”
허묵의 말을 가만히 듣던 채은이 입을 열었다. 교수님이 말한 걸 전부 할 수 있는 곳이 방금 생각났어요. 허묵은 두 눈을 빛내며 그녀에게 온 시선을 집중했다. 그래요? 학생이 찾아낸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채은은 조금 수줍게, 그렇지만 또 조금은 대담하게 말했다.
“교수님, 우리 드라이브하고 올까요?”
*
두 사람은 곧 함께 집 밖으로 나섰다. 며칠 전 백화점에서 보았던 커플 트레이닝복을 차려입은 채였다. 주머니에 간단하게 핸드폰과 지갑만을 챙긴 둘은 곧 주차된 차에 올랐다. 이내 경쾌하게 시동이 걸리고, 차가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사소하고 규칙적인 일상들 속에서 찾아낸 오랜만의 일탈이었다.
“목적지는 어디가 좋겠어요, 여보?”
“음… 강변으로 갈까요? 이 시간엔 사람도 많이 없을 테니 조용히 산책하기에도 좋을 거예요.”
허묵은 그녀의 말에 당신이 가고 싶다면 얼마든지요, 하고 핸들을 강변 쪽으로 꺾었다. 이제 막 자정이 넘어갈 무렵이었고, 채은의 말대로 거리엔 사람이 확연히 적었다. 둘만의 시간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린 둘은 가로등 불을 비추는 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두 손은 절대 놓을 일 없다는 듯 단단하게 서로를 붙잡았다.
“그래도 곧 가을이 오기는 하려나 봐요. 새벽바람은 조금 선선하네요. 강가라 그런가?”
“아마 그럴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 곧 가을이 오겠죠.”
그리고 언제나 나는 당신과 함께할 거고요. 그의 믿음직한 말에 채은이 싱긋 웃었다. 응, 저도 교수님과 함께일 거예요. 두어 달이 지나면 거리의 나뭇잎은 단풍이 물들 것이고 온 세상이 알록달록하게 번져 가는 계절이 올 것이다. 그리고 허묵과 채은의 가을 또한 아름다운 색으로 빛날 것이었다. 둘은 필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따뜻한 세상으로 물든 서늘한 계절을 함께 발맞추어 걷는, 그런 다정한 상상. 그리고 허묵이 허묵이고 엄채은이 엄채은인 한, 그 상상은 분명 이루어질 일이었다.
“다음엔 저녁 시간에 오는 것도 좋겠네요. 같이 자전거도 타고.”
“좋아요! 말 나오니까 교수님이랑 같이 자전거 타고 싶어졌어요.”
이렇게, 늘 당연히 이루어질 다음 약속을 내걸곤 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란, 다음 약속을 향해 걸어가는 일이겠다. 어떤 사랑이든 모두 비슷할 테지. 채은은 가벼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와 이렇게 한여름 밤의 강가를 걷는다는 일이 꿈 같이 아름다웠다. 그래, 한여름 밤의 꿈처럼. 하늘에 걸린 달처럼 언젠가 형체가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그녀는 내심 두려웠지만 깊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옆에서 이렇게 든든하게 손을 잡아주는 남자는, 절대 내 곁을 떠날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산책이 끝난 후, 허묵과 엄채은은 다시 차량으로 돌아와 운전석과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의 손에는 각자 커피와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모처럼 즐기게 된 이 휴식 시간을 더 즐기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이대로 잠들기는 아쉬웠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문 채은이 마냥 아이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귀여워라. 허묵이 안전벨트를 매며 싱긋 웃었다. 아이스크림이 좋은 건 알겠지만, 얼른 당신도 안전벨트 해요, 바보.
“그럼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야행성 아가씨?”
“자주 갔던 심야 극장으로 가요. 교수님이랑 영화 보고 싶네요, 오랜만에.”
“전에 함께 보다가 먼저 잠들어버린 학생이 누구더라?”
“…오늘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그래요, 알았어요. 부풀려진 채은의 볼을 가볍게 쓸어내린 허묵은 이내 몸을 돌려 핸들을 잡았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떠다니는 새벽의 거리에는 사람도, 자동차도 없었다. 두 사람을 실은 차가 적당한 속도로 도심을 가로질렀다. 두 사람의 ‘심야 데이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을 기다리는 수많은 약속의 약속들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