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소희.png

   “유리, 유리! 우리 저기 가보자.”

   “아까도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이번엔 진짜로. 진짜 마지막이야.”

 

   유리는 어쩔 수 없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미에의 뒤를 따른다. 일본에 온 것은 휴가의 의미가 컸지만, 그건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연인, 모치즈키 미에에게서도 휴가를 내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미에에게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하세츠까지 찾아온 것인데. 경각심 없이 SNS에 올린 사진 탓에 하세츠가 고향인 미에에게 있는 장소를 들켰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미에가 평소처럼 러시아에 있었다면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그녀 역시도 일본에 와있었다. 어떻게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올 수가 있지? 아무튼 그렇게 우연히도 일본에 머무는 날짜가 겹쳤던 탓에 미에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계속해서 받게 되었다.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따라 나오기는 했다만. 내가 생각했던 휴가는 시원한 방에서 빈둥거리며 쉬는 것이지 이렇게 더운 날에 거추장스러운 옷 입고 사람들 북적한 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고.

 

 

   “유리! 빨리 와봐. 여기!”

 

   멀리서 목소리가 들린다. 바로 앞에 있었는데 언제 저만큼 멀어진 것인지. 유리는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긴다. 꿈에도 없던 여자친구 꽁무니 쫓아다니는 일보다도 그 녀석을 놓친 이후가 더 귀찮은 일이 될 것이 뻔하다. 꽤 멀리 나왔기에 숙소까지 돌아가는 길도 모르고, 지도를 본다고 해도 맞게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물어보자니 제대로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을 확률이 얼마나 될지도 의문이다. 결국 유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에의 장단을 맞춰주는 일이다.

   미에에게 가까이 가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흥분했는지 단숨에 알아챘다. 미에의 쭉 뻗은 팔을 따라가자 꽤나 진심으로 탐내던 키티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축제의 노상 점포에 저런 고급스럽고 귀여운 인형이 걸려있다고? 이게 무슨 우연이람. 유리는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상을 쓰며 대꾸한다.

 

   “아, 됐어. 안 해.”

   “아아, 그래도. 한 번만! 딱 한 번만! 응?”

 

   미에의 눈빛은 이미 갖지 못하면 귀가도 없다는 결의를 단단히 다진 눈빛이었다. 괜히 말싸움하느냐고 시간 보내느니 빨리 해결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유리는 잔뜩 찌푸린 낯을 풀지 않은 채 미에에게 500엔짜리 동전 두 개를 쥐여준다.

 

   “그 안에 못 따면 그냥 가는 거다?”

 

   미에는 자신이 있는 건지 그저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기쁜 건지 환하게 웃으며 점포 앞을 지키는 아저씨에게 돈을 내고 총을 잡는다. 유리는 미에를 기다리는 사이 아까 전 어딘가에서 받은 부채로 부채질을 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조명도 그렇고 가게도 그렇고 온통 붉은색이다. 이래서 일본 국기에 빨간색이 들어가는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여름이라고 하면 가장 피하고 싶은 색이 빨간색 아니냐고. 추위도 더위도 뭐든 극단적이면 누구든 좋다는 사람 없겠지만, 빨강이 가득한 여름이라니. 상상만 해도 더운데 그 한 가운데 있으려니 더 덥다. 부채질을 해도 몸에 달라붙은 여름 공기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미에는 아주 신중하게 인형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보아하니 마지막 한 발인 듯했다. 1,000엔이나 냈으면 많은 발을 쐈을 텐데. 아직도 맞추지 못한 게 어지간히 요령 없네 싶은 게 귀엽기도 했다. 그래도 마지막 발 만큼은 제대로 명중했으면 좋겠다. 아깝게 놓쳤을 때의 불평불만을 들어줄 기력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유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마지막 한 발마저도 인형을 비껴가고 말았다. 미에는 울상이 되어서 유리에게 돌아온다. 그래도 빗나간 총알이 주위에 있던 것들을 맞췄는지 손에 과자 한 박스와 캐릭터 열쇠고리가 들려있다. 유리는 그것을 받아 들어 들고 있던 비닐봉지에 넣는다.

 

 

   “이제 진짜 가는 거야. 너 분명 마지막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큰 소리와 함께 하늘을 수놓는 불꽃에 묻히고 말았다. 불안한 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하던가. 미에의 표정은 이 불꽃놀이른 보고 가자고 말하는 듯했다. 유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확 쓴다. 하지만 미에의 눈에는 이미 유리의 표정 따위 아웃 오브 안중이다.

 

   “보고 가자!”

   “야. 미에.”

   “왜애. 불꽃놀이가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잖아. 이건 진짜 보고 가라는 계시라니까?”

 

   얼굴의 온 근육을 이용해 싫음을 표현하곤 가차 없이 뒤를 돈다. 사실은 나가는 길도 모르지만. 예상대로 미에의 손이 옷자락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유리는 웃음이 없는 낯으로 다시 몸을 돌려 미에를 본다.

 

   “저런 건 가면서도 볼 수 있잖아. 나는 내일 가야 된다니까. 지금도 충분히 오버했거든? 누구 덕분에.”

 

   유리의 단호한 말에 미에는 겨우 아쉬운 걸음을 유리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무리해서 끌고 나온 것이니만큼 더 억지 부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유리의 말대로 나가는 길에도 볼 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미에는 과감하게 유리의 팔과 몸 사이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는다. 유리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그냥 무시하고 그렇게 걷는다. 유리가 팔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 빼라는 신호겠지만, 미에는 이것도 그냥 무시한다. 좋다는 말보다 짜증 난다는 말이 더 자주 오가는 둘에게는 이것도 정말 큰 표현이다. 불꽃놀이 아래의 커플 같은 거, 모두가 꿈꾸는 영화의 한 장면 아니겠어? 누군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미에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좋았지?”

   “뭐가.”

 

   미에의 표정이 너무 밝아서 의아하기까지 했다. 이런 얼굴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좋냐 싫냐 묻는다면 당연히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녀석 앞에서 순순히 좋다고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유리는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가는 불꽃의 퍼포먼스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불꽃과 사람들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는지, 미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간다.

 

   “유리랑 이런 데 올 기회 별로 없잖아. 사실 나도 이 시기에 일본 오는 거 오랜만이라서, 여름 축제도 오랜만에 온 거였거든. 그랬는데 유리 덕분에 더 재밌게 놀았다구. 내년 여름에도 또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아, 됐어. 더워죽겠는데.”

   “쑥스러워하기는.”

 

 

   미에가 실실 웃으며 유리의 볼을 잡아당긴다. 겨우 3달 빨리 태어났으면서 되게 어른인 척이야. 유리는 고개를 돌려 미에의 손을 떨쳐낸다. 정말 어렸을 때나 받던 귀여움이다.

   일본에서 둘이 만나면 꼭 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게 가장 좋지 않다. 이렇게 넓고 사람이 많은 공간에 의지할 사람이 미에밖에 없다. 국제미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은 있다만. 이 이상으로 피곤해지고 싶지 않기에 얌전히 미에의 뜻을 따를 뿐이다. 유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은 최대한 미에 쪽을 보지 않고 걷는 것이다. 유리 나름의 이유도 있다.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는 미에의 시선이 생경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다.

 

   “또 뭔데.”

   “아까 그거 유리 줄게!”

   “필요 없어.”

   “아까 총 쏴서 받은 거 전부!”

   “그러니까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유리는 어떤 미래가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이 봉투 안에 담긴 것을 전부 안고서 출국길에 오르는 미래가. 미에의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쏘는 유리의 입가에도 미소가 살짝 피어올랐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