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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이 시작되었다. 온 세상이 물에 잠겼다. 조금이라도 덜 젖기 위해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뛰어다니거나, 전철에 오르거나, 인력거꾼을 불렀다. 그럴 돈이 부족한 사람은 처마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비가 조금이라도 그치기를, 혹은 제가 타고 가야 하는 전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일부는 기웃대다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장마철 손님이란 으레 그런 이들이었다.
고래별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도 이런 유형이었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비를 피해 들어온 손님으로 이미 홀은 만석이었다. 덕분에 직원들은 커피와 차를 만드느랴, 주문을 받고 계산하랴, 빈 잔을 치우고 손님에게 차를 가져다주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수아 역시 잔심부름을 하다 손이 부족하면 홀로 나갔다. 려하는 열심히 차와 커피를 만드는 틈틈이 홀로 왔다 갔다 하는 수아를 지켜봤다. 행여 그에게 추군대는 상스러운 놈이 있는지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까지는 않았지만 시선이 계속 수아에게 향했다. 여직원에게 수작 좀 걸어볼까 간을 보던 이들은 려하와 눈을 마주치고 움츠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날카로운 눈매가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수아가 다가왔다. 려하는 수아에게 방금 만든 커피를 내밀며 4번 식탁으로 가져가라고 귀뜸했다.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받아 려하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그의 왕방울만한 눈동자를 떠올리고 려하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도 나름 잘 적응하는 듯 해 다행이었다. 수아를 지켜보는 려하를 보고 순임이 빙긋 웃었다.

“수아 양이 그리도 마음에 걸립니까?”

려하는 순임을 바라보았다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사람으로 태어나 측은지심을 안다면 어떻게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수 형님, 아니. 송해수 씨는 조선의 사람에게 잿물을 먹였답니까? 친일파의 하녀라 해도 그렇지 우리의 동포 아닙니까? 먼저 수아 양이 가져온 편지를 읽었다면 그 사단도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수아 양의 눈에 가득 찼던 그 독기를 보셨습니까?”

그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울분에 가득 차 가위를 치켜들던 수아를. 순임은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려하는 듣지 않으리라. 해수는 간도에서, 려하는 자유시에서. 수많은 동포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대의를 위해서라며 무고한 사람에게 그런 극약을 먹였는가. 려하는 아마 해수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이 일로 그를 경멸하게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해수 형님’이 아닌 ‘송해수 씨’라 부르는 시점에서 다시 친해지기란 어려운 일일 것 같지만.
답지 않게 말을 우수수 쏟아내고 려하는 풀이 죽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물에 쫄딱 젖은 채 돌아와 주인에게 혼나고 시무룩해진 강아지를 보는 듯했다. 순임은 도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해수 동지를 너무 미워하지 않길 바랍니다. 려하 동지. 해수 동지도 분명 마음속으로 속죄하고 있을 테니까요.”

글쎄요.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아주 잘 지내는 듯 하던데요. 려하는 며칠 전 우연히 길에서 만난 해수를 떠올렸다. 여전히 의뭉스러운 표정에 려하는 눈살을 찌푸리곤 그가 발견하기 전에 자리를 떴다.
려하는  비아냥대려다 말을 삼켰다. 그래, 순임 아주머님이 무슨 죄야. 송해수 그놈이 아주 여러 사람 애를 먹이는구나. 려하는 마저 커피나 타기로 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아니, 지금은 물에 젖은 호랑인가. 하여간 옛말에 틀린 말 하나 없었다. 딸랑, 하며 문이 열렸다. 수아와 려하는 동시에 문을 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해수가 우산을 접으며 고래별 안에 들어왔다. 큰 우산으로도 비가 가려지지 않는지 양복이 젖어 색이 짙어졌다. 그의 걸음마다 물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수아는 해수를 보자마자 잔뜩 긴장해 뒷걸음질 치려 했다. 해수와 수아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의 발이 멈추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려하가 급히 식탁을 주먹으로 쳤다. 그제야 해수가 려하 쪽을 보았다. 려하는 해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와서 얌전히 일손이나 거들어라’. 일본 경찰이나 매국노를 볼 때만 나오는 서슬 퍼런 눈빛이었다. 집안 대대로 무인이라더니 평소의 맹한 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 볼 수 없는 살기였다. 아닌 여름에 한기를 느끼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움츠렸다. 해수는 익숙한 듯 무심하게 홀을 가로질러 음료제조대로 향했다. 수아는 해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 다른  테이블로 달려갔다.

“아직도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드나 봐?”

순임에게서 수건을 받아들며 해수가 굳이 말을 걸었다. 려하는 으, 하고 눈살을 찡긔곤 고개를 홱 틀었다. 사내 녀석이 속 좁게 굴기는. 해수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며 피식 웃었다. 누가 봐도 려하를 겨냥해 하는 말이었다. 머리카락이나 제대로 말리고 오세요. 려하는 제조대 뒤쪽으로 해수를 보냈다.
잠시 후 해수는 물기를 다 닦은 뒤 앞치마 차림으로 돌아왔다. 해수는 려하의 옆에서 잔을 닦고 차를  만들었다. 려하는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그에게 자연히 시선이 갔다.
비가 그칠 줄을 몰랐다. 손님이 머물다 가는 시간도 그만큼 길어졌다. 차를 비우고도 자리를 드지 않는 사람이 늘어났다. 회전률이 낮아지면 그만큼 새로 들어오는 손님도 없기에 가게 입장에선 그닥 내키지 않는 상황이지만,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쟤는 빨리 가주었음 좋겠다. 려하는 해수를 째려보았다. 해수는 오로지 커피에 집중하고 있었다. 려하는 해수가 만든 우유 그림을 보다가 제 작품을 보았다. 삐뚤빼뚤한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려하는 입술을 비죽였다. 키도 크기, 얼굴도 반반하지. 말도 잘- 입을 열 때마다 맞을 말만 해댄다는 점이 흠이지만 - 하지. 의학도 공부했으니 머리도 좋을 테고. 그 안하무인하고 능글맞은 태도만 감추면 온 시내 아가씨의 마음을 뺏을 상이다.
그래봤자 나랑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려하는 속으로 잔뜩 투덜댔다. 하지만 제일 마음에 안 드는 점을 꼽으라면, 여즉 수아에게 빈말로라도 미안하다 사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어떻게 사람이 저리 뻔뻔할 수 있는지. 려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나한테 구멍이라도 나면 책임져줄 건가?”

여직원에게 완성된 커피를 건네며 해수가 말을 걸었다. 려하는 얼굴을 팍 찡그리며 받아쳤다.

“바깥이 물비린내로 가득하던데요. 지금 아니면 못 맡을 테니 밖에 나가서 실컷 즐기는 게 어떻습니까?”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빈 잔을 들고 오던 수아가 둘의 신경전을 감지하고 어찌 할 줄 몰라 발을 굴리고 있었다. 해수는 수아를 바라보곤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굳이 바깥에까지 나가야 하나? 창문만 보아도 여름임을 알 수 있는데.”

그리 말해놓고 해수는 저고리와 모자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우산은 고래별 안에 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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