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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그럼 이것으로 천지해 소집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길고도 짧은 회의가 끝났다. 천지해 일원은 각자 수고했다느니 어디서 뭘 하자느니 약속을 잡으며 해산했다.
요양 중인 현 사슴 수장 한울을 대신해 - 그분은 연세도 많으신데 자꾸 어딜 나섰다가 다쳐서 돌아오신다. 세 시간동안 무리 좀 하지 말라고 설교했는데도 허허 웃기만 하신다 - 소집에 응한 차기 수장 초향은 집에 갈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이렇게 더운데 어딜 돌아다닌다는 거야. 자고로 여름에는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누워 자야 한다. 산바람이면 더 좋고, 나무그늘을 곁들인다면 금상첨화다. 하늘이 돕기라도 하는지 오늘은 초향에게 말을 거는 이도 없었다. 이대로 퇴근이다! 초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행복해진 초향의 어깨를 붙잡는 손이 느껴졌다. 감촉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손의 주인은…. 망할! 차기 상제다! 초향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초향 님? 잠시 시간 되십니까?”
“일단 그게 뭐든 전 거절하겠습니다 차기 상제.”

초향은 덜덜 떨면서도 주둥이를 나불댔다. 알고 지낸 지 이제 석 달 째라지만 이런 접촉이나 대화는 여전히 어색하고 무서웠다. 초향은 제발 그가 술 이야기만 꺼내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다른 친목도모회나 임무도 전부 거절하고 싶었다. 이런 성격으로 어떻게 차기 사슴 수장을 할 생각을 했는지 초향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자기 대에서 이렇게 갑자기 천지해 간 사이가 좋아질 거라고 생각도 못 했고, 그래서 초향은 이렇게 많은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무난히 하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하여튼 저 황룡이 문제다.
륜은 사람 좋은 낯으로 안타깝다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일은 초향 님밖에 할 수 없는 걸요. 다른 분은 개인적인 업무나 선약이 있다고 하시고. 저번 사건 때 입은 부상이 다 낫지 않은 분도 계시니. 마침 아무 약속도 없을 초향 님이 이 사건을 맡으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대체 무슨 근거로 제가 선약이 없을 거라 여기셨습니까?”
“항상 그랬으니까요.”

만담은 그걸로 끝났다. 완벽한 초향의 패배였다. 초향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벽을 쳤다.

“그리고 륜 님도 있지 않으십니까. 매일 솔선수범하며 발로 뛰어다니시던 분께서 어쩐 일로 제게 업무를 맡기시는지요?”

한껏 비아냥을 담아 물었다. 륜은 초여름의 볕을 닮아 반짝이는 미소를 지었다.

“저를 그렇게 봐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저는 이 사건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에 문제가 된 지역엔 용을 쫓는 결계가 쳐져 있거든요.”

무슨 말이지? 초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을 쫓는 결계라니. 누가 봐도 황룡을 견제하기 위한 수작질이다. 차기 상제나 현 상제가 들어가지 못하면 해결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나 보지. 멍청하기는. 그짝들의 면상이 보고 싶었다.
결국 초향은 두 손을 들었다. 하늘이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초향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양 륜은 아리따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럴 줄 알고도 응한 나도 참 바보지. 초향은 두 번째 한숨을 쉬고 딱딱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용건만 이야기하십시오.”
“네. 최근 그림자 산 안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허. 귀신? 천계에 귀신이라. 명계에 산 자가 갔다는 얘기만큼이나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것 참 재미있는 괴담이군요. 그건 제가 아니라 저승차사와 염라공주에게 항의할 문제 같습니다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런데 그 자가 귀신이 아니라면 어떡해야 할까요.”

하긴, 명계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면 용을 막는 결계가 아니라 차사를 물리는 결계를 쳤겠지. 역시 귀신은 잘못 본 녀석으로 인해 생긴 소문이었나. 하긴 다른 곳도 아니고 그림자 산이니 그럴 수 있다. 매해 실족사고가 일어나고, 대체 무슨 심술맞은 주인과 산신이 있는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이상한 산이니까. 과연 그런 별천지에서 누가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왜 사람들은 그 위험한 그림자 산을 올라갔을까. 초향의 의문은 거기에 있었다. 륜의 보고에 의하면 그자가 발견된 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고 한다. 누가 그 험준한 산속에서 오랫동안 버티면서,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째서 위험한 줄 알면서 그림자 산으로 갔을까.

“백고지 님과 시후 님은 너무 어리시고, 결계의 특성상 하늘이 닫혀 여우노와 여우로도 다가갈 수 없어요. 현오 님도 당연히 들어갈 수 없고요. 그리고 우리 중 산을 잘 타는 이는 한울 님과 초향 님밖에 없는데, 한울 님은 요양 중이시고….”
‘네. 제가 가야죠. 아무렴. 그래야죠.”

초향은 자포자기하며 대꾸했다.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요. 초향은 뒷말을 삼켰다.


02.
다음날, 초향은 한울에게는 비밀로 하고 그림자 산으로 향했다. 그 기슭엔 이미 륜이 도착해 피해자로 보이는 이와 대화하고 있었다. 귀신에게 호되게 당했는지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밤도깨비에게 당했던 사슴 일족이 떠올랐다. 초향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륜이 초향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초향은 허리 숙여 인사한 뒤 그에게 다가갔다. 륜은 그 사이 모은 정보를 초향에게 알려주었다.

“범인은 다양한 소리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걸로 사람을 혼란에 빠트립니다.”
“음, 설명만 들어서는 앵무 일족 사람 같은데. 장난을 좋아하잖아요, 그 일족은.”

초향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륜은 동의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머리카락이 화려하다는 목격담도 있고요. 하지만 그 귀신은 ‘사람의 목소리’까지 모사할 수 있어요. 앵무 일족은 거기까진 하지 못하죠.”

초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람의 목소리. 왜 그렇게까지 많은 피해자가 났는지 짐작이 갔다. 이상한 짐승의 소리라면 모를까. 아는 사람의 목소리에 이끌려 갔다가 절멱에 떨어졌다면…. 초향은 륜에게 질문했다.

“혹시 피해자 중 산이 아니라 마을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자는 있습니까?”
“아, 네. 총 네 명입니다. 각자 친구, 어머니, 아들, 그리고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서 산으로 갔다 합니다.”

초향은 생각에 빠졌다. 한울 님의 제자였던가. 그 도사 형이 알려주었다. 인간계에는 장산범이라는 괴담이 있는데, 사람이 아는 자의 목소리로 꾀어내 잡아먹는 귀신이라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귀신은 없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재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실제로 지금 그와 유사한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륜은 두루마리를 접으며 말했다.

“범인은 주로 밤에 활동합니다. 해가 질 때 즈음 산에 들어가주세요.”
“저기, 전 그렇게 밤눈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만.”

초향은 중얼거리다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호롱불이라도 들고 가야지요, 뭐. 의기소침해 중얼거리는 초향을 보고 륜은 안타까운 듯 웃다가 품에서 월광석을 꺼내 건네주었다.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보석입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아, 감사합니다.”

초향은 제 목숨줄 - 일지도 모르는 돌 - 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안 주었다면 진심으로 멱살을 잡을 뻔 했다. 아무도 없이 혼자 가야 하는데 어둠에 대비할 것도 안 준다? 악덕이라고 신고할 거다. 그리고 다신 천지해 소집 때 가지 않을 거다. 이런 속좁은 생각을 하며 중얼대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 꽁한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멀어지는 륜을 보고 초향은 제 이마를 짚었다. 이제 정말 해야 한다. 돌이킬 수 없다. 과거의 나는 어쩌자고 차기 상제의 제안을 덜컥 거절했을까. 무슨 어거지를 써서라도 탈출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한들 전부 쓸데없는 일. 엎어진 물이었다.
어쨌든 내가 해야 한단 말이지. 멀어지는 륜의 등을 보고 초향은 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한다고 한 사람은 나니까. 내가 수습해야지. 그렇게 생각하자 부담감이 몰려왔다. 그런데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내가 귀신에게 밀리지 않을까?
아까부터 그들을 바라보던 피해자 겸 목격자가 소리없이 다가왔다. 어느 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그를 보고 초향은 놀라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초향은 침착하자고 되뇌이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혹시 사슴 수장님이신가요?”

동문서답. 초향은 다시 참을 인을 새기며 대답헀다.

“아니요. 저는 차기 수장입니다. 현 수장님께서 몸이 편찮으신 탓에 제가 대신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이곳은 바깥과 교류가 원활하지 않아서요.”

그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초향은 그가 심한 충격으로 의기소침해졌다고 생각했다. 초향도 겪어본 적 있어 공감이 갔다.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그가 먼저 용기를 내 초향의 손을 덥썩 잡았다. 초향은 몸을 떨며 손을 빼내려다가 진정했다. 피해자는 더듬대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꼭 이번 사건의 범인을 밝혀주세요!”
“네? 아, 네. 물론입니다. 천지해에게 맡겨주세요.”

…라고 장담한 지 반 시진 째. 초향은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막상 그림자 산에 들어왔더니 앞뒤를 분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주변에선 스산한 소리가 났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어딘가에선 달큰한 냄새가 자꾸 나 코가 마비되었다. 속되게 말하자면 토기가 치솟았다. 범인은 대체 어떻게 이런 산에서 버티고 있을까. 술법에 의한 감각 마비라 해도, 이 정도면 결게를 친 본인도 울렁증을 느끼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부 뒤로 하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약속이 자꾸만 초향의 발목을 잡았다. 초향은 한숨을 삼키고 천근같은 다리를 움직였다.
그래도 희소식이 있었다. 환경에 익숙해지자 조금씩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안개가 잔뜩 끼어 장소를 특정할 만한 지형지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초향은 발에 닿는 감각으로 제가 서 있는 곳을 파악했다.
몇 번 돌아다니고 초향은 결론을 내렸다. 륜의 말대로다. 결계가 쳐져 있었다. 아까부터 비슷한 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하지만 흔한 ‘가두리 술법’과 다른 점이 있었다. 계속 다니다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면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범인은 피해자를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했을 거다. 초향은 분신을 이용해 뚫린 구석을 찾아 나아갔다.
하지만 묘하게, 륜의 언급과 다른 구석이 있었다. 륜은 분명 목소리로 유혹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두리 술법을 쓴다면 굳이 목소리를 흉내낼 필요가 없는데. 초향이 위화감을 느끼며 숨을 고를 때였다.

「초향 군? 어디 가세요?」

토기 수장, 아묘의 목소리였다. 초향은 저도 모르게 반응을 보일 뻔 했다. 그 자이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초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는 어설픈 짓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범인은 시랑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쪽 길이 아닌데」

그럼 당연히 이쪽으로 가야지. 초향은 청개구리 심보를 발현해 범인의 말과 정확히 반대로 움직였다.
귀신은 목소리를 바꿔 가며 초향의 주의를 끌려 했다. 양현, 천혜향, 노을 등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마음을 흔들려 했으나 초향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울로 둔갑해 유혹했을 때는 헛웃음이 나왔다. 발목 삐어서 요양 중인 분이 이 험준한 산을 어찌 오르셨답니까? 초향은 속으로 비아냥대며 결계의 근원지를 찾아다녔다. 분명 범인은 그 끝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넓은 산을 혼자 돌아다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초향은 한숨 돌리기 위해 바위에 걸터앉았다. 역시 수족이 더 필요했다. 초향은 주변에 있는 풀잎을 뜯었다.

“자, 범인을 찾아 와.”

초향은 손바닥에 잎사귀를 모아놓고 입김을 불었다. 잎이 공중에 흩날리면서 작은 초향으로 변했다. 초향의 분신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기력을 회복한 초향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서 범인의 수다를 들을 바에야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편이 백 배는 더 이득이었다.

뚫린 구멍이나 허술한 부분을 찾아 초향은 전진했다. 어느 새 노을도 다 저물고 별이 총총히 뜨고 있었다. 초향은 하늘을 보았다. 조금 앞에 북두칠성과 북극성이 보였다. 산 위로 가고 있나? 도무지 심정을 알 수 없는 자이군. 초향은 투덜대며 힘을 냈다.
잠시만. 초향은 다시금 위화감을 느끼고 멈추었다. 하늘이 막혔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해 수장과 달 수장이 간섭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초향은 제가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을 메워가는 별이 선명하게 보였다.
…설마. 초향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초향은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했다. 하아, 초향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하늘을 향해 내쉬었다. 그래도 장난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차기 상제. 초향은 꿍얼대며 정상으로 향했다.


03.
“아, 저기 오시네요.”
“잘 찾아왔네.”
“흥. 꽤나 애 먹을 줄 알았는데.”
“재미없어.”
“별로 놀라지도 않구.”
“시끄러워요.”

초향은 투덜댔다. 그는 너나 할 것 없이 한 자리 차지하고 앉은 천지해를 죽 둘러보았다. 특히 옥수수술을 홀짝이는 륜과 한울을 유심히 째려보았다. 그들은 모르는 척 한여름의 청취를 즐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기껏 끌어올린 천지해의 위신과 인기가 바닥을 치겠어요. 사슴 하나 속이려고 이런 짓을 벌이다니요. 초향은 한껏 비아냥대며 륜을 흘겨보았다. 난 분명 말렸다는 석류가 반박했으나 초향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륜은 반쯤 취기가 올라 헤실대면서 예쁘게 웃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초향 님은 끼지 않을 테니까요.”
“맞아. 초향이는 융통성이 없으니까.”
“거짓말보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더 좋습니다.”

초향은 한울의 말에 반박했다. 륜과 한울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은은하게 미소지었다.

“어? 진짜로요? 정말? 거절 안 할 거예요?”

눈치없이 인이 끼어들었다. 초향은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보다! 아래에서 본 그 사람 역시 당신이죠?! 제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아주 즐거우셨겠네요!”
“앗, 들켰다.”
“아오!”

초향은 포효를 내지르곤 한울 옆에 앉아 술을 들이켰다. 위를 보니, 취하기 좋게 달이 아름답게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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