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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워.”

 

   아침보다는 점심에 가까워지는 늦은 오전.

   이른 아침부터 밖에 다녀온 데스페라도는 식탁 의자에 지친 몸을 맡겼다.

 

   “여름이니까.”

   “올해는 더 더운 것 같은데.”

   “그래? 라이엇이 태어난 해의 여름보단 낫다고 생각했는데.”

 

   부엌에서 꼼지락거리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하던 루엔이 차가운 음료를 내어왔다.

   얼음을 넣은 홍차는 향긋한 향과 투명한 붉은빛이 매력적이었지만, 목이 마른 사람에겐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 같은 게 없었다.

   단숨에 잔의 반을 비운 그는 맞은편에 앉는 아내에게 물었다.

 

   “애들은?”

   “놀러 나갔어. 이렇게 더운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젊으니 괜찮겠지.”

   “우리 애들은 젊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그게 그거지.’ 그렇게 답하려던 데스페라도는 자신과 루엔도 아직은 젊은 축이라는 걸 떠올리고 입을 닫았다.

   이제는 늙을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벌써 자신을 늙은이 취급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이 잔인한 현실과는 별개로, 확실히 제 자식들은 아직 어렸다. 부모의 눈으로 봤을 땐 핏덩이나 다름없었지.

 

   “오늘은 일없지?”

   “오늘 같은 날은 동물도 그늘에서 안 나올걸. 짐승만도 못한 놈들은 주로 밤에 나오니 지금은 안 보일 테고.”

   “그럼 너도 쉬어. 열사병 걸리면 약도 없어.”

 

   루엔은 제 몫으로 가져온 차가운 홍차를 마셨다. 레몬 한 조각이 얼음 사이에 아무렇게나 올려진 홍차에선 희미한 단맛이 느껴졌다.

 

   “날씨가 미쳤어.”

   “너는 더위를 잘 타니까 더 견디기 힘든 걸지도 모르겠네.”

   “애들도 더워하던데.”

   “네 체질을 닮은 건가.”

 

   더위에 힘이 빠진 데스페라도를 보고 있자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제 아이들은, 더위 타는 체질만큼은 아비를 닮은 걸지도 모른다고.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난 아이린과 라이엇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냉장고에서 차가운 음료를 꺼내 마셨고, 아침을 먹을 때까지 창가에 앉아 새벽공기를 쐬었다.

 

   ‘너무 더워!’

   ‘누나, 가까이 붙지 마…….’

 

   시원한 걸 하나씩 입에 물고 늘어져 있던 두 아이의 모습은 얼마나 귀여웠던가. 누가 보면 별거 아니라 할지 몰라도, 부모는 원래 아이들의 사소한 언행에 미소 짓는 법이었다.

   그때 데스페라도가 집에 없었다는 게 얼마나 아쉬웠던지. 그는 얼음이 벌써 반이나 녹은 남편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추위 타는 것보다는 더위 타는 게 낫다고 생각해.”

   “그건 네 생각이고.”

   “진심이야. 올겨울은 얼마나 추울지…….”

 

   데스페라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어 죽을 정도로 추워도 좋으니, 차라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추위에 덜덜 떨 아내를 생각하면 겨울도 그리 반갑지 않다. 극단적인 무법지대의 사계절에 혀를 찬 데스페라도는 채워진 잔을 또 비웠다.

 

   “라이엇은 더위도 추위도 안 타는 것 같던데.”

   “걔라면 더워도 추워도 말 안 하는 걸지도 몰라. 그래도 오늘 아침엔 덥다고 늘어져 있더라?”

   “하긴. 그 녀석이 좀 과묵하긴 하지. 말만 안 하는 걸지도 몰라.”

 

   마주 보고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더워서 그런 것인지, 침묵하고 있는 편이 더 편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점심은 어쩌지.”

   “나는 안 먹어도 되는데.”

   “입맛 없다고 안 먹으면 더 늙는다.”

   “너보다 나이 서너 살 더 많다고 그렇게 말하기냐.”

 

   ‘하하.’ 웃음을 흘린 루엔이 턱을 괸 채 입을 다물었다.

   잔 안의 얼음이 녹을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가운 홍차가 미지근해질 무렵, 피곤해 보이던 루엔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간 열대야였지.’

 

   아무리 더위를 안 탄다고 해도 너무 더우면 잘 수가 없어진다. 졸고 있는 상대를 깨우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던 데스페라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엄마! 나 단추 떨어졌어!”

 

   그렇게 해가 중천쯤 왔을 때. 밖에서 신나게 놀고 있던 아이린이 떨어진 단추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도대체 뭘 하고 놀았기에 단추가 떨어졌는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제 부모라면 그런 건 묻지 않고 단추를 달아줄 테니까.

 

   “우와아아…….”

 

   하지만 아이린은 아무런 부탁도 하지 못하고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식탁에 나란히 앉아 기분 좋게 잠들어 있는 부모를 봤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부탁해야지.’

   모처럼 함께 쉬고 있는 부모님들을 방해할 수는 없지. 겨우 8살이라고 하지만, 무법지대 아이들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아이린이 조용히 빠져나간 집에는, 열기에 물들어 노곤하게 잠든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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